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나의 두 번째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우선, 내 경력 중 가장 이질적이고 설명이 어렵다. 어떠한 목표를 두고 입사한 것도 아니었고 일을 배울 환경이 잘 조성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배운 것은 아직도 잘 활용하고 있다. 더불어 일을 하다 보면 그 시절을 계속 참고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시리즈를 적는 큰 이유다.


약 20년 전 일했던 그곳은 백 명이 좀 넘는 직원이 일하던 전자회사였다. 크게 보면 인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생산조직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설계하던 연구조직 그리고 영업팀 총무팀을 포함하는 사무조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총무팀 소속으로 그리고 입사 직후 신규사업팀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회사가 투자한 스타트업과의 JV를 만들기 위한 화학산업에 기반한 신사업 TFT로 파견되었다. 기술과는 무관한 사무직, 자료조사와 문서 작성이 주 업무였다. 각종 뉴스를 검색하고 수백 장 짜리 보고서를 읽고 파워포인트 문서를 만들어 공유하고, 회의에 참여해서 회의록을 기록하고 메일을 작성했다. 생각과 지식을 문장으로 정리하는 기초를 학교 신문사에서 배웠다면, 이를 소위 말하는 업무용 언어로 바꾸는 것은 이곳에서 배웠다. 두 회사의 각 임원들만 들어가 있던 TFT의 유일한 사원으로 문장을 정리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적는 것뿐 아니라 비정형적으로 표현되는 정치적 언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시 남길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다.

아직도 첫 업무를 기억한다. TFT업무와 연관된 많은 기사가 뒤죽박죽으로 스크랩된 문서를 받아 정리하는 것이었다. 손으로 스크랩하다 보니 광고가 붙어 있거나 제목이나 날짜가 누락되거나 해서 정리하기가 어려운 문서였다. 기사를 읽으며 키워드를 뽑아내고 언론사 사이트에서 기사를 다운로드하고 형식을 정리하는 스크립트를 작성한 다음에 다시 읽고 주제별로 정리했다. 스크립트를 사용하여 시간을 번 덕분에 그 산업과 관련된 더 풍부한 자료를 찾아보고 이해할 수 있었고, 며칠 후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의 차 속에서 대표님과 상무님이 미팅과 견학의 내용을 정리하는 동안 정리에 필요한 요소들을 바로 말씀드리고 칭찬받았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사실 칭찬도 칭찬이지만, 면허도 없던 시절 상무님이 운전하고 사장님이 보조석에 앉아 출장을 정리하는 동안 졸지에 뒷자리 상석에 앉아 대화에서 놓치는 부분은 없는지 떨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입사한 지 한 달도 안돼서 일어난 일이다.


그 회사에서의 시간이 의미 있었던 점 중 하나는 회사와 구성원을 다면적으로 관찰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 회사에서 나는 ‘깍두기’ 같은 존재였다. 회사에 조금씩 불어오던 변화의 바람 가운데에 있었지만, 어린, 그리고 근무기간이 길지 않을, 또 업무가 겹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은 경계할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회의를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 점심 후 쉬는 시간, 그리고 기숙사의 저녁 시간 같은 그 틈틈의 시간의 담소의 과정에서 나는 크게 신경 쓰이는 존재가 아니었고, 수많은 대화들을 - 어떤 것들은 서로에게는 쉽게 말하지 않았을 대화를 포함해서 -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다양한 목소리가 있었지만 주요 의사결정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표현의 다양함 혹은 과격함과는 별개로 비슷비슷하게 단편적이고 공허했다.

거기에 더해 다른 시선을 더했던 건 TFT업무 그리고 TFT업무 때문에 옵저버로 참석했던 임원회의였다. 이름은 거창했지만, TFT에는 양사의 임원과 나만 소속되어 있었다. 일은 많았지만 그만큼 각 임원들과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임원들 역시 회의가 아닌 틈틈의 시간에는 가벼운 언어로 일과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부동산 투자나 골프 같은 일상의 대화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틈새로 새어 나오던 일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는 또 다른 시선과 관점이 담겨 있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한 생각들은 회의나 보고 자리에서의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사람에 대한 것은 좀 달랐다. 회사와 본인의 위치에 따른 실리적인 평가들이 다시금 숨어 있었다. 임원회의에서는 회사의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계획이 정리되어 절제된 언어와 정제된 숫자로 공유되었다. 선택지들이 공유되고 검증되고 선택된 결정이 어떻게 다른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지속적으로 추적되었다. 실무자들의 의견들은 숫자로 바뀌고 나면 종종 소수점 아래의 수로, 무시된 것은 아니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무언가로 기록되었다.

다양한 층위에서 말과 숫자가 쏟아지는 것을 조용히 들을 수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각자의 위치와 경험, 식견과 생각에 따라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언어로 표현하는지를 보았다. 표현된 언어들이 어떻게 정리 기록되고 파악되고 다시 다음 계획으로 바뀌고 진행되는지 볼 수 있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회사에서 특이한 위치에 존재했기 때문에 얻은 희귀한 경험이었다.


또 다른 귀한 경험은 잠깐 언급한 주간회의에 참석한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대표님의 일하는 방법을 본 것이다. 주간회의는 표면적으로는 준비가 필요 없는 가벼운 회의였다.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는 사장님의 기조에 따라, 발표 자료 역시 최소한으로 준비되었다. 더 정확히는 공유할 내용이 있다면 평소 정리된 스프레드 시트나 회의록 같이 기초 데이터로 보여주고 발표자료를 만드는 시간도 아끼라는 말이 더해졌다. 그러나 주간회의가 늘 긴장감이 가득했던 것은, 발표에 더해지는 질문들이었다. 대표님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내용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배경자료 혹은 부서 간 논의가 명확한지 교차 검증을 요구하시거나 지시사항을 더하셨다. 만일 내용에 대한 질문에 답이 나오지 않거나, 데이터에 오류가 있거나, 혹은 데이터가 발표 내용과 다른 경우에는 매우 호된 질타가 쏟아졌다. 숫자 놀음으로 오랜 경험의 노련한 회의주관자 - 대표님의 눈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간 회의가 이렇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참석자 모두 자신의 담당 부분의 업무에 대해 일상적으로 명확하게 파악하고 언제나 공유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준비와 형식은 간결했고, 의사결정 과정은 최대한 투명했지만, 그 무게는 심히 무거웠다. 회의, 특히 중요한 의사를 결정하는 회의에 대한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회의에서의 깐깐함과는 별개로 일상적으로 대표님은 여유 있고 너그러운 모습이셨다. 회의가 끝나면 실질적인 업무는 다른 임원들에게 위임되었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차에서의 모습처럼,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막내사원을 뒷자리로 보내는 실리적인 모습과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누구에게나 질문하고 또 들으실 줄 아는 분이셨다. 이러한 태도는 현황에 명확한 이해와 좋은 선택으로 이어졌다. 추구하는 회사의 방향이 분명하고 그에 맞춰 회사를 끌어가는 분이셨다. 정리하면 현명하고 조화로운 리더십을 가진 분이셨다.


기억을 더듬어 남길 수 있는 말만 남겼더니 구멍이 보이는 글이 되었다. 좋은 순간만은 아니었다고, 피로가 누적되어 편도염이 도저히 낫지 않아 연말에는 며칠씩 입원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음도 추가로 기록해 둔다. 정리하면 한 회사를 여러 시선으로 동시에 관찰할 기회 그리고 경영철학에서 시작하는 좋은 리더십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의 때와 회사의 때가 맞았던 희귀한 경험이었다. 특히, 엔지니어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 조직에 대해 몸으로 부딪치며 관찰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과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과 일하며 각자의 말에서 숨겨진 의미들에 대한 해석을 들을 기회와 이를 통해 사람을 더 쉽게 이해하게 된 경험 그리고 좋은 리더십이라는 것이 구성원의 단점과 장점을 어떻게 축소하고 확대하는지, 이 것을 책에서 표현되는 모호한 단어가 아니라 몸으로 체험한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운이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희귀한 경험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당당하게 결론내고 이 글을 끝내고 싶다. 그렇게 끝내기엔 알게 된 것을 내 것으로 만들었는지, 또 지식을 기반해서 행동했는지에 대한 자신감이 아직 모자라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대신,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좋은 경험을 했고, 그것에 기반해서 그 이후에도 더 넓고 빠르게 다양한 문제를 볼 수 있었고, 덜 나쁜 사람이 되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