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면 글을 좀 올려야지 했는데, 계절이 이렇게 한바퀴라 돌 줄은 몰랐다. 오래간만에 2017년 여름 facebook에 올렸던 글을 조금 손봐서 올린다.

그때 그 물건

그때 만든 IR LED with Raspberry PI

며칠 전에 오래간만에 또 원격으로1 에어컨을 켜고 끄는 장치를 만들었다. 여름이 오는 소리가 들리면 누구는 매실을 담그고 누구는 여름옷을 살 텐데 내게는 에어컨 리모컨을 만드는 것이 여름을 맞는 행동이 된 거 같다. 2년 만에 만들고 나서 보니 왜 내가 처음 채팅으로 에어컨을 켜고 끄는 것을 만들었는지 이제는 이야기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몇 마디 남긴다. 페이스북이 그 이야기를 올릴지 3년 되었다고 말도 해주었고 말이다.

그 당시 만든 이유에 대해서 딱히 설명한 기억이 없으니, 대부분 그냥 할 수 있어서 만들었다고 생각할 것 같다. 사실 나는 할 줄 안다고 만들거나 할 정도로 부지런하지 않다. 게으름은 프로그래머에게 언제나 좋은 미덕이라고 배웠다. 이득과 명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미루고 미루고 미룬다. 공부도 원리를 이해할 만큼만 배우고(물론, 이게 양이 적다거나 쉽다는 건 아니다.) 이유가 생길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는 편이다. 어차피 할 일은 넘치고 넘친다. 다만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더 길고 귀찮은 일이 되기 때문에, 대충 ‘그냥 했어’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니, 그때의 그 시스템을 구성한 것은 할 수 있어서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회사의 커뮤니케이션은 email에서 시작해서, 여러 메시징 서비스(카카오톡, google talk, 문자), 오프라인 대화 등 여러 가지 갈래로 이루어졌었다. 정보가 자꾸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추적되지 않는 대화들이 끊임없이 이뤄졌다. “발로” 뛰어서 정보를 모으고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당시 사내에서 일부가 시범적으로 slack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대규모 서비스를 지탱하는 기술’에서 언급된 하테나의 IRC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사례가 인상적이었던 기억에 도입해 보았다. 확실히 개발팀의 경유 각종 개발 이슈(티켓, 커밋)와 서버 상태 등이 공유되어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한편, 개발팀은 slack 사용의 유인이 분명한 반면, 비 개발팀의 경우 사용률이 낮았는데, 딱히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채팅방 기반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메신저와는 달리 다자간 대화를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사내의 이슈들이 공개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 기존의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많이 낮춰줄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slack을 사용하게 할 것인가? 당시 여러 방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다지 사람을 움직일만한 유인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는 초 여름이었고, 사무실에는 추운 자리에 앉은 사람과 더운 자리에 앉은 사람이 있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은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다녔다. 그래서 만든 것이 특정 명령어를 치면 에어컨이 동작하는 시스템이다. 겨울이라면 아마 기온을 고려한 점심시간 알림 및 식당 추천 봇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채팅으로 에어컨을 켜고 끄는 것은 그리 편하지 않다. 오히려 데스크톱 아이콘이나 모바일 앱이면 모를까 채팅에 명령어를 치는 것은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다. 단순히 에어컨만 끄고 켜는 용도라면 아두이노로 만든 만능 리모컨을 여러개 만들고 오락실의 퀴즈게임용 커다란 버튼(아니면 easy 버튼)을 책상 한가운데 두는 것이 좀 더 효율적일 것이다. 어떤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는 철저하게 문제를 보는 시선에 달려있다.

세상에는 굳이 말로 설명하면 구차하고 어색해지는 것들이 있다. 슬랙으로 에어컨을 켜고 끄는 것도 그렇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몇 가지 말을 더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을 싫어한다. 개발자는 프로그래밍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코드는 가끔 아니 종종 현실의 문제들을 개선한다. 코드는 제품 뿐 아니라 회사를 좀 더 앞으로 보낼 수 있다.

약 10줄의 코드는 ChatRoom기반의 커뮤니케이션을 회사의 주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만드는데 꽤나 기여했다. 위의 말들은 코드가 회사를 바꾼 작은 기록이다.

덧붙임) 사무실의 쾌적함은 온도만큼 습도가 중요하다. 리모콘보다 온습도계 도입을 꼭 추천드린다.

그때 적은 글은 여기까지다.


  1. 이때는 집에 설치하고 telegram bot과 연동해 에어컨을 애플워치로 켜고 껐었다. ↩︎